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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청백리

우리가 아는 역사인물 중에 누가 청백리였을까요?

  • 맹사성(孟思誠, 1359~1431)

    맹사성도 황희 정승처럼 집에 비가 샐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으며, 고려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그때부터 조선시대 세종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쳐 좌의정·우의정에까지 올랐어요.

    맹사성은 검소하고 너그러운 한편 강직한 사람이었어요. 1430년 <태종실록>을 엮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세종이 <태종실록>을 한번 보자고 하자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뒷날 반드시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이 두려워서 그 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대하여 세종이 이를 따랐다고 해요.

    역사의 공정한 기록을 위하여 왕은 실록을 보지 않게 되어 있는데, 세종도 자기 아버지에 관한 기록이니까 보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옳은 것을 굽히지 않고 말하는 신하의 뜻을 받아들인 거지요.
    또한 맹사성은 늘 소박한 차림에 소를 타는 것을 좋아했대요. 언젠가 맹사성이 온양에 있는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하러 갈 때 있었던 일이에요.

    맹 정승이 행차한다는 얘기를 듣고 산소로 가는 길목에 있는 두 고을의 원님들이 길을 깨끗하게 닦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맹 정승이 지나가기도 전에 웬 늙은이가 태연하게 소를 타고 오더라는 거예요. 그 노인은 행색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지요.
    원님들은 잔뜩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요.
    "이 늙은이야, 정승께서 지나가시라고 닦아놓은 길을 네가 뭔데 먼저 지나가려 하느냐?"
    그러자 맹사성이 아주 태연하게 대꾸했었지요.

    "지금 고불(맹사성의 호)이 소 타고 고향에 성묘가는 길이오. 허허." 맹사성은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열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7일 동안이나 밥을 굶으며 어머니를 생각했다고 해요.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시·음악에도 뛰어나 향악을 정리하고 스스로 악기를 만들기도 했어요.

  • 유명한 황희 정승이 청백리에서 빠질 수 없죠. 황희 정승은 일생 동안 여러 벼슬을 거쳐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을 무려 25년이나 지내면서도 늘 청렴 결백하게 살았어요.

    황희는 고려 말에 태어나 21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면서 경기도의 두문동이라는 곳에 숨어살았어요.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간청으로 벼슬길에 다시 나와 세종 때까지 네 분의 임금을 모시며, 어질고 현명한 신하로서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잡는데 많은 공을 세웠어요. 특히 세종 때는 영의정을 18년 동안이나 지내면서 어진 정치를 베풀어, 임금과 백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어요.

    황희는 "허허 정승" 이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하지요? 집에 있을 때 자기 집 하인의 아들딸들이 몰려와 머리카락과 수염을 잡아당기고 매달려 놀아도 그냥 허허거리고 웃었대요. 하지만 나라 일을 할 때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옳은 것을 말하고 과감하게 일을 추진했어요. 오랫동안 높은 벼슬을 지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자신은 항상 가난한 생활을 했어요 .

    어느 날 세종이 평복을 입고 백성들의 형편을 살피러 대궐을 나섰다가 황희 정승 생각이 나서 발길을 돌렸어요. 황희의 집은 초라한 단칸집에 담도 없었어요. 세종은 겉은 그래도 안은 좀 다르겠지 하고 들어갔어요. 그런데 막상 안을 보니, 방바닥에는 멍석이 깔려 있고, 있는 것이라고는 즐겨보는 책뿐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었어요. 왕은 그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서 이렇게 농담을 했다지요?
    "등이 가려울 때 그 멍석에 대고 비비면 시원하겠구려." 막내딸이 결혼할 때는 혼수를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세종이 혼수를 대신 마련해 주었어요. 황희는 그 인자한 성품과 청렴한 생활로 오늘날까지 모든 정치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어요.

    황희는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기 위해 농사를 개량하고, 인권을 존중하여 노비제도도 재정비했어요.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지은 책으로 <방촌집> 등이 있어요.

    황희(黃喜, 1363~1452)

  •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임진왜란 때 왜군이 쳐들어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그에 대비할 것을 주장한 유성룡도 청백리였어요. 유성룡은 퇴계 이황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이황은 그의 뛰어난 자질을 보고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해요.

    1591년 좌의정으로 있을 때 왜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권율과 이순신 장군을 등용하자고 했어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병조판서와 군사를 총괄하는 도체찰사를 겸했어요. 곧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모시고 평양에 이르렀으나 직무를 다하지 못하고 나라를 그르쳤다고 주장하는 반대파 때문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어요. 의주에 이르러 다시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어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되찾았어요. 곧이어 영의정과 충청·경상·전라 3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했어요.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방력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훈련도감을 만들어 군사를 훈련하고, 무기를 만들었으며, 성을 튼튼하게 쌓는 등 국방을 강화하는 데 힘썼어요. 그러나 얼마 뒤에 반대파의 모함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지요. 뒤에 다시 벼슬을 주었으나 나가지 않았어요. 유성룡은 도학과 문장, 덕행과 글씨 등 모든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어요.

    지은 책으로는 <징비록>이 유명해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틈틈이 쓴 전쟁 수기라고 할 수 있어요. 지난 일을 뉘우치고 경계하여 다시는 그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지은 제목이라고 해요.

  • "땅꼬마 오리" 이원익 대감도 청백리였어요.
    키가 너무 작아서 "키 작은 재상" 이라고 불렸다지요? 임진왜란 때 왕의 피난길을 잘 인도한 공으로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군사를 모아 유성룡과 함께 평양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어요. 그 뒤 영의정에 올랐으나, 일본과 화해함으로써 현실적인 외교를 펼 것을 주장하던 유성룡을 변호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어요.

    나중에 다시 영의정에 올라 전국적으로 대동법(백성들이 궁중이나 나라에 바치던 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제도)을 실시하여 잘못된 세금 제도를 고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폈어요.

    이원익은 왕실의 가문인데다 영의정을 두 번이나 지냈으면서도, 집은 겨우 비바람을 피할 정도였고, 그날그날 끼니를 걱정해야 했어요. 언젠가 이 사실을 안 왕이 비단과 비단 이불을 선물로 보냈다고 해요. 그러나 오리 대감은 "떳떳한 이유가 없는 물건은 누가 내려주어도 받을 수 없다"며 돌려보냈대요. 왕은 이원익의 이런 꼿꼿한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고 해요.

    이원익은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성격이 원만하여 당파싸움에서 반대파들에게도 호감을 샀다고 해요.

    이원익(李元翼, 1547~1634)

  • 이항복 (李恒福, 1556~1618)

    "오성과 한음" 의 오성 대감 이항복도 청백리였어요. 어린 시절 친구인 한음 이덕형과 기발하고 재치있는 장난을 즐긴 이야기가 유명하지요. 9세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한때 불량배로 헛된 세월을 보내기도 했는데, 어머니의 교훈에 감화되어 학업에 열중했어요.

    예조 정랑을 지낼 때 정여립의 난(왕의 신임을 잃은 정여립이 정권을 잡으려고 군사들을 일으킨 사건)을 지혜롭게 잘 수습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선조와 왕비 , 왕자 등을 호위하여 피난시키는 한편 그 뒷수습을 하는 데 힘썼어요. 그 공으로 형조 판서가 되는 한편 오성 부원군(임금의 장인이나 정1품 벼슬아치 에게 주는 관직)에 봉해졌어요. 이항복을 오성 대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또한 이항복은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할 것을 건의했어요. 그러나 명나라는 조선이 왜군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며 구원군을 보내주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항복은 명나라의 오해를 풀어, 명나라 구원군의 도움으로 평양과 서울을 되찾는 데 공을 세웠어요. 이항복은 외교에 뛰어나서 명나라 사신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항복을 찾았다고 해요.

    전쟁 중에도 재치와 익살을 잃지 않아서 임금까지도 늘 껄껄 웃게 하였던 이항복은 당파 싸움 때문에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어요. 나중에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우의정으로 있을 때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내쫓자는 의견에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귀양가서 죽었어요. 죽은 뒤에 다시 벼슬이 내려지고 청백리에 올랐어요.